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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의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02

사진)옥산서원 편액과 은행나무(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옥산서원 편액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우리 선조들이 관청이나 서원에 은행나무와 향나무를 유독 많이 심었던 이유는 이 나무들은 진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 여러 해충들이 기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직에 나아가거나 학문을 탐구하고 연마하는 자신이 세속에 쉽게 물들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나무를 바라보며 늘 교훈으로 삼고자하는 뜻에서 심었던 것이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20년 후 경주부윤 이제민과 권덕린 등 도내유림(道內儒林)들의 뜻으로 이언적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묘우(廟宇)를 건립한 곳이다. 그 다음해 관찰사 김계휘(金繼輝)가 계청하여 1574년 옥산(玉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서원 이름을 ‘옥산’이라고 사액한 것은 서원이 자옥산자락에 있었기 때문이며, 자옥산은 해가 질 때 서쪽 하늘이 자주색으로 물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옥산서원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인당(求仁堂), 강당은 그 명칭에 있어 회재선생이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남긴 많은 저서 중 대표적 저서인 구인록(求仁錄)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생은 인(仁)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많은 노력을 경주 하였는데 이러한 회재선생의 뜻을 안 후학들이 그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이 구인당의 편액(偏額: 문 위에 가로로 다는 현판)글씨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 한 명인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글씨이며 옥산서원의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최초 사액(賜額) 당시에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였으나 현종 4년(A.D 1838)에 구인당 이 화재를 입어 다시 사액 받은 것이다.


이언적은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이었으며, 그는 월성 손씨와 여강이씨의 집성촌인 양동마을의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2세 때 부터 외삼촌인 손중돈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익혔다. 그의 본래 이름은 적(迪)이었는데, 31세 때인 1521년(중종 16년)에 왕의 명으로 언(彦) 자를 더 붙여 언적(彦迪)이 되었다고 한다.


회재선생이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그가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깊이 생각하고 힘써 행했으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고, 성품 또한 과묵했으며, 애써 재능을 숨겼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선비적인 품행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옥산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인 것만 보아도 회재선생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짐작케 한다.


회재선생은 경상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운했다. 그의 첫 번째 불운은 1530년(중종 25년) 김안로가 정계에 복귀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다가 반대파인 심언광 등의 모략으로 파직되어 물러난 것이다.


두 번째 불운은 당시 훈구파, 외척들이 서로 미워하며 일으킨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이었다. 벽서사건은 낙향한지 2년이 지나 고향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는 귀양간지 7년만인 1553년 11월 23일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했다. 효심이 깊었던 그의 아들 이전인(李全仁)은 12월 12일부터 추위와 눈바람을 무릅쓰고 강계에서 시신을 운구하여 이듬해 2월에 고향에 도착한 뒤 흥해 달전리 도음산 선영에 안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재선생은 평생을 학문에 정진한 선비로서, 그러한 영향으로 후학들과 후손들이 선생의 뜻을 따라서 학문에 정진하였기에 현재까지도 선생을 모시기 위해 이 서원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오늘날도 분명 회재선생과 같이 평생을 학문에 정진한 훌륭한 학자가 많이 있을 진데, 지성인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조차 인문학과 관련한 분야들은 사회경쟁력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치부되어 고사위기에 처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다. 거기에 더하여 사제간의 인격적인 관계와 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 또한 사라져 가고 있다.


회재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그의 학적을 따랐던 후학들이 세운 옥산서원은 여전히 건재한데 그 그릇에 담긴 뜻은 퇴색돼 버린지 오래되었다. 훌륭한 선배 학자를 그리며 옥산서원의 편액을 쓴 추사 김정희가 또한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보여준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제자에게 그려준 한 폭의 세한도(歲寒圖)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열 폭 백 폭으로 늘어나길 바래본다.



원문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11&...


김호상, 문화유산, 경주, 신라, 안강읍, 옥산서원, 추사, 김정희
Writer : 김호상
 | Travel regions :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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