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강릉 단오제의 단오장에서의 소지올리는 모습(문화재청 자료)
설명) 단오장(端午粧)은 음력 5월 5일 단오에 했던 풍습가운데 하나로 나뿐 귀신을 없앤다는 뜻에서 행하여지던 여인들이 예쁘게 꾸미는 모습[治粧]. 의례 후 기원문을 불태움.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마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대사회에서나 현대사회에서나 남성이나 여성이나 동일할 것이다. 화장품이 빈약하였던 삼국시대에는 쌀을 맷돌에 갈은 후 고운 체에 거르고 여기에 조개껍질을 곱게 갈아 섞은 화장품을 작은 분합에 담아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이것을 ‘백분’ 이라 하는데 백분을 물에 잘 개어 누에고치 껍질에 묻혀 얼굴에 부드럽게 펼쳐 바르면 얼굴이 하얗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또 밤에 바르고 자면 밤 동안에 피지가 분비되어 얼굴에 부착이 잘 되었으므로 미백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백분은 쌀가루이므로 접착력도 없고 날 비린내가 나서 화장품으로서는 결점이 많아 조선시대에 오면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활석(滑石), 백토(白土), 황토(黃土) 등에서 납성분이 가미된 물질을 추출하여 연분(鉛粉)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백분은 곡식 비린내는 없앴지만 만성 납중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구려 쌍영총의 여인상을 보면 빨간 볼연지를 찍고 입술도 빨갛게 색칠하였으며 눈썹은 초생달 같이 동그스럼하게 화장한 모습을 보면 삼국시대에도 여성들은 색조화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만큼 화장 풍속이 일반화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백제시대에는 지리적인 환경에 맞게 평야지대의 온화함과 중국 및 남방문화와의 교류에 영향을 받고 여인들의 화장술도 변화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경우는 옷의 길이가 길어지고 색감이 화려해진 것을 볼 때 화장도 짙고 화려했을 것 같으나 화장보다는 오히려 장신구가 옷과 어울리게 화려하고 우아하였다.
신라여인들도 백제여인들과 비슷하게 얼굴보다는 머리치장에 보다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에 문무왕 6년(666)에는 ‘부녀의 모든 복장을 당나라와 동일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당시 당나라 여인들은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기 때문에 신라의 여인들도 이와 같은 화장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진다.
시대에 따라 미(美)의 기준은 다르게 마련이지만 오늘날 까지도 변하지 않는 미인의 기준중 하나가 윤기 흐르는 머리채를 소유한 것일 것이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머리에 윤을 내기 위해 동백기름과 아주까리기름을 사용했는데, 이것을 정성스럽게 골고루 바른 후 참빗으로 여러 번 빗질을 하면 머릿속을 자극하여 튼튼하고 윤기 흐르는 머릿결을 유지 할 수 있었다.
특히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여인들은 냇가로 나가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는데 이것은 여인들은 빛나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고유의 명절 단오에 여인들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예쁘게 화장하는 것은 나뿐 귀신을 없앤다는 뜻에서 행하여지던 풍속이었다. 미적인 여유를 축제로 즐겼던 선조들의 생활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있어 행복하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