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원성왕릉 서역인상 : 원성왕릉을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걸어 놓은 능’이라는 뜻으로, 관을 묻을 때 물이 나와서 돌기둥을 받치고 그 위에 시신을 넣은 관을 올려놓았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성왕릉(元聖王陵)은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한 모습이며, 신라왕릉 중 진위여부가 밝혀진 몇 안 되는 왕릉 중의 하나이다. 원성왕은 재위기간(A.D 785~798) 동안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최고의 고대 저수지인 벽골제(碧骨提)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 앞에는 왕의 무덤을 지키는 서역인상으로 불리는 석상 한 쌍이 서있다. 이 석상은 머리부분에 중앙아시아식 터번을 착용하고 있으며 오른팔은 위로하여 주먹을 움켜잡고 왼손으로는 1m 가량의 몽둥이를 짚고 있다. 2.4m의 키에 깊게 파인 눈, 높은 코는 서역인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무사의 복장이 아닌 장식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을 입고 있다.
이 석상에 대해서는 페르시아인 ․ 아리아인 ․ 이란인 ․ 오만인 ․ 위구르인이라는 등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으며 그 역할에 대해서도 무인상(武人象) ․ 객사상(客使象) ․ 병사상(兵士象)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어찌되었건 이 서역인상을 통해 찬란했던 신라문화의 우수성과 그 우수성을 바탕으로 한 국제교류 등 당시 신라의 세계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간혹 미국정부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인도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동양과 같은 사후관(死後觀)이 없다 할지라도, 자국의 국민이라면 주검마저도 본국의 땅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애국적 면모를 접하게 된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살아가면서도 납북인 가족에 대한 애달픈 사연과 그들 가족의 몸부림에도 꿈적하지 않은 우리를 마주하게 된다.
실은 유적답사 때 마다 느껴왔었던 것이지만 원성왕릉 앞을 지키고 있는 서역인상을 통해 신라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곤 한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석인상의 모티브가 된 주인공이 느꼈을 먼 이국의 땅에서의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우리에게, 정작 나에게 닥치지 않았다고 무관심해 버린다면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에 더하여 같은 민족이 보인 무관심에 2중으로 아파 할 것이다. 소외된 납북인 가족들을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할 때 진정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