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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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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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신라의 석공, 명장 윤만걸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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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윤만걸 명장님과 가업을 잇는 아들 동천과 동훈(경주 남산작업장)

감상) 석공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 실존인물 소크라테스와 가상인물 아사달. 소크라테스 그의 아버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석공의 일을 하였고, 가난하였던 소크라테스 역시 어린시절 석공의 일을 하였다. 다보탑과 석가탑을 만들었다는 전래이야기를 소설로 탄생한 아사달. 그까짓 천리길 닷새면 가오. 맨발로 밤낮 걸으면 닷새면 가오 / 석가탑만 끝내면 닷새면 가오. 그까짓 강이나 산고개 단숨에 갈게 / 행여 당신 입김인가 하고 눈바람 부는 겨울밤 진달래 피는 봄저녁 달소리에도 놀래요 행여 당신 오시나하고 / 조금만 기다려요 조금만 기다려요 이 탑만 끝내면 단숨에 갈게. [신동엽전집], 창작과 비평사, 1985. 오페레타(석가탑 부분의 노래 ‘그까짓 천리길’ 중에서 발췌)

출처) 김호상, 2010, [경주문화]16호, 경주문화원. ‘명사를 찾아서’


단풍잎이 떨어지고 연이어 국화가 아름답게 피는 11월 중순, 석공 명장 윤만걸(尹晩杰 59) 선생을 찾아가며, 문득 ‘우리는 얼마만큼을 살아야 만족을 할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100년도 아쉽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50년 삶도 버겁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년을 산다면 우리는 신선이나 십장생의 불로장생을 떠올릴 것이다. 천년을 훨씬 지나고도 변하지 않는 석조유물들이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는 이유, 그리고 다시 천년이 지난 후에도 그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 돌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장인들이 있었고 또 있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선생은 울산 정자리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시절 부산으로 이사한 후, 서울에서 석재 일을 하던 친구와 함께 오영근선생(전라도 익산)의 문하에 들면서 부터라 한다. 이후 안압지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경주에 자리를 옮겨오게 되었고, 이후 80년도에 처음으로 선배의 배려로 경주공업고등학교 뒤편 농장부지에 작업장을 갖게 되었다. 개인 작업장을 갖게 된 기쁨도 잠시, 일이 없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해졌다.


선생은 그 때마다 작업장 가까이에 있는 서천 둔치에 앉아 선도산의 석양을 바라보며 석공의 일을 하다가 죽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런 어려운 시절에도 부인 박미숙(58)씨는 불평 한 마디 없이 ‘한번 시작한 일, 끝을 보아야 되지 않겠어요’ 라는 격려로 오히려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다른 일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며, 그 동안 고생시킨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움을 내어 보였다. 그런 선생의 모습이 국화 같다고 생각을 했다.


젊은 시절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선생은 신라문화동인회의 답사를 따라 다니면서 많은 유적지의 다양한 유물들을 보며 안목을 넓혔고, 유물제작에 사용되었을 기법을 생각해 내며 스스로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한 선생의 노력과 남다른 실력을 눈여겨보셨던 한국의 대표적 석탑연구자 동국대학교 故장충식교수의 추천으로 청련암(창녕군 계성면 사리)의 다보탑 조성을 재현할 기회를 얻었으며, 이후 경주남산의 천룡사지 3층 석탑복원, 포석정 재현을 비롯하여 현재의 울산 태화루 복원공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화재복원공사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다.

경주남산에 복원된 석탑 중에는 선생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필자가 작업장을 찾은 그날에도 선생은 문화재청에서 실시하는 문화재표준품셈작업(드잡이 분야)을 위해 전국의 기술자들과 함께 데이터 도출을 위해 실험을 하고 있었다.


현재 선생은 노동부에서 지정된 석공명장으로 그의 문하에는 동천(37), 동훈(33) 두 아들과 2명의 수련생들이 일을 배우고 있다. 두 아들들은 아버지가 권유하지도 않았는데도 틈틈이 아버지 일을 도왔고 결국 가업을 잇게 되는 것을 보면서 ‘선생은 월래부터 석공의 핏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선생에게 가까이에 있는 경주남산의 조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경주 남산에 새겨진 모든 불상들은 잘 되었고 못 되었다의 평가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든 모든 사람들이 성스러운 예배의 대상을 심신을 다해서 만들었을 것이며, 때문에 그 중 미숙한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열정을 다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라 말했고, 그 말 속에는 비단 선조뿐만 아니라 그 또한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작품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쏟았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생을 망치와 정을 든 거칠고 딱딱해진 선생의 손을 잡아보니 기대와는 다른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선생은 석공의 일을 손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셨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부디 명장님이 꼭 해보고 싶으시다 하시던 석굴암 재현작업의 꿈을 이루시게 되길 바래본다.



원본글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10&...


김호상, 문화유산, 신라, 석공, 윤만걸, 명장, 문화재,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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