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황남대총(경주시 황남동 6-1 대릉원 내)
설명) 황남동 고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표주박처럼 생긴 두 개의 무덤이 황남대총으로 알려진 98호 고분이다. 표형분의 북분(사진의 왼쪽)의 능이 여성의 무덤, 남분(사진의 오른쪽)의 능이 남성의 무덤이다. 남쪽의 무덤이 먼저 만들어지고, 얼마 후 북쪽의 무덤이 남쪽의 무덤에 연결시켜 축조하였다. 이 무덤은 1973.7~1975.10월까지 발굴되었는데, 북분의 여성무덤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고, 남분의 남성무덤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한국의 역사 속에는 고려나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고구려나 백제에도 없었던 여왕이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3명이나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세계역사에서도 드문 경우이다. 특히 진흥왕대에 왕과 신료들은 원화(源花)제도를 통해 인재선발 방법을 놓고 고심하다가 ‘여러 무리를 모아 함께 노닐게 한 다음 그 행동을 살펴서 발탁하자.’ 고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뽑은 것은 남성이 아니라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는 것은 신라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어느 시대보다도 더 컸음을 짐작 할 수 있게 한다.
신라에서는 여왕 이외에도 자신의 이름으로 사회활동을 한 여성들이 여러 명 있었다. [삼국유사]에 경덕왕의 왕비인 삼모부인(三毛夫人)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쫓겨났지만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해졌고, 이후 50만근에 이르는 황룡사종을 주조하는데 어마어마한 재력을 희사하였다는 점은 그녀가 이혼 이후에도 사회생활이나 경제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음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또한 최치원의 사산비명 가운데의 하나인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 경문왕의 누이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이 되자, 자기의 봉읍(封邑)인 현계산 안락사(安樂寺)에 지증대사(智證大師)를 주지로 모시고 사찰의 남쪽 농장과 노비의 문서를 절에 시주하고 큰 시주자로 행세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여성들은 모두 왕족이나 귀족층과 관련된 사례이기 때문에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짐작하건데 전반적으로는 신라의 여성들이 비록 남성들과 비교해서 사회적으로 열등한 처지였지만, 조선시대 여성에 비하면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누렸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고대사회에서 이혼녀나 미망인들이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보아 재산 상속권에서도 남성과 대등한 권한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러한 재산 소유권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 경주지역에서 가장 큰 98호 고분인 황남대총(황남동에 밀집되어 있는 고분 중 가장 큰 고분이라는 의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황남대총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80m, 남북의 길이가 120m, 높이 25m나 되는 거대한 무덤으로 경주에 있는 신라고분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고분은 두 개의 무덤이 표주박모양으로 붙어 있어 표형분이라고도 부른다. 이 고분은 왕이 먼저 죽은 뒤 왕비의 무덤을 왕의 무덤에 붙여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북분(北墳)은 왕비, 남분(南墳)은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목걸이, 팔찌, 곡옥 등 장신구가 주류를 이루는 유물이 나왔고, 남분에서는 무기류가 주류를 이루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의 발굴로 왕비도 금관을 부장용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은 발굴이었고, 왕비의 능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금관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우리는 ‘왕관’ 이라 부르지 않고 ‘금관’이라 부르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여성들은 가히 한국역사에 있어 어느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의 지위와 권위가 높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사회 곳곳에서는 여성이 약자로 살아가는 곳이 생각보다 더 많기에 남성의 지위에 비해서 좀 더 많은 배려를 해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여권의 신장이 여성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상승되었다면, 지금부터는 남성들이 수레의 양쪽바퀴처럼 사회구성원으로서 모든 여성들에 대하여 진정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어 준다면 한국사회는 한 단계 더 높은 남녀평등사회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