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경순왕릉(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사적 제244호)
설명) 경순왕 김부는 927년 경애왕이 포석사(鮑石祠, 현재의 포석정 터)에서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그의 무덤은 현재 비무장 지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왕릉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담장인 곡장이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고려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의태자 묘는 북한의 강원도 금강군에 소재하고 있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순왕은 신라 56대의 마지막 왕으로 견훤에 의하여 추대되어 즉위하였지만 후삼국의 혼란은 수습하지 못하였다. 신라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토지가 됨으로 해서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외롭게 되었다. 경순왕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여겨 여러 신하와 더불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하였다.
이 때 맏아들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말하길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命)이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나라의 외로움과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더 이상의 형세는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왕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는 곧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경순왕은 935년 11월에 백관을 이끌고 서울에서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은 30여리에 이어져 길을 꽉 메웠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담을 둘렀다고 한다. 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가 경순왕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태조에게는 9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맏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성술부인 소생의 공주 두 사람을 아내로 삼게 하고 정승의 직위를 주었다. 경순왕 역시 삼촌 억렴의 딸을 태조에게 아내로 삼게하여 아들(후에 안종으로 추봉)을 낳았고, 안종의 아들이 고려의 8대 왕인 현종(顯宗)이 된다.
경순왕과 마의태자를 생각해보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들처럼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끝이 나지 않는 자신과의 토론을 하고 있는 듯하다. 포석정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경애왕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경순왕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인 두려움이 죄 없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마의태자의 선택은 안락한 길보다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외로운 길을 간 것이었다. 현대역사에서 느끼는 우리의 애정은 경순왕이 선택한 길 보다, 마의태자가 간 길을 가고 싶은 이유는 개혁과 변화의 목마름 때문일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