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36 | 736154

상차리는 남자가 상남자인 시대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26

Travel regions : South Korea
 | Hits : 16158
https://blog.lookandwalk.com/km/blog/kjlove1966/4851/trackback

사진) 황복사터 구황리 삼층석탑(경주시 구황동 103)

설명) ‘나(유홍준)에게 경주를 가르쳐준 분은 국립경주박물관장을 두 번 역임한 소불(笑佛) 정양모선생이었다. 소불선생의 자네, 진평왕릉 가보았는가? 이 물음 이후 경주에 갈 때마다 맨 먼저 들르는 곳이 언제나 진평왕릉 이었지만 느낌이 없어 고통스러운 화두 속 7년 만에 깨달았다는 진평왕릉. 그 곳은 사계절 중에서 오뉴월 들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가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한다.’(유홍준, 1993,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pp.135~140)

이 진평왕릉과 벌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황복사 절터의 아름다움은 나를 경주에 머물러 살게 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며, 필자가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는 경주 낭산의 유적지 중의 한곳이다. 내게는 오뉴월도 아름답지만, 벼가 익어 황금들판을 이루는 10월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문화유산편지 가족분들께 올 10월에는 신라문화의 광맥과도 같은 낭산의 유적 둘러보기를 권합니다. 탑 뒤편으로 보이는 논길을 걷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신라인들이 가장 신령스럽게 여겼던 낭산(狼山)의 동북쪽 산자락에 황복사(皇福寺)라 전해져오고 있는 폐허에 삼층석탑 하나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이 탑을 해체 수리 했을 때 나온 사리함의 뚜껑 내부에 새겨져 있는 조탑명문(造塔銘文)으로 이 석탑은 효소왕 원년(692)에 건립되었고, 신문왕의 두 번째 왕비인 요석공주의 딸 신목왕비(神穆王妃)와 아들 효소왕(孝昭王)이 죽은 신문왕을 위하여 탑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탑을 세운 신목왕비는 신문왕의 두 번째 왕비이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장례기간 중 첫 번째 왕비의 아버지인 장인 김흠돌이 반란에 연루되자, 장인을 죽이고 왕비를 궁중에서 쫒아내고, 즉위 3년째 김흠운의 막내딸을 두 번째 왕비를 맞이하였다. 이 신목왕비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인 김흠운(?~655)과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로 유복녀일 가능성이 있다. 그의 아버지 김흠운은 무열왕 2년(655) 백제와의 전투인 양산(충북 옥천)의 조천성 전투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신문왕은 김흠운의 막내딸을 최상의 예를 갖추어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4년 후인 신문왕 7년(687) 2월에 태자를 낳으니, 이가 곧 효소왕이 되는 이홍(理洪) 이다. 늦도록 아들이 없던 신문왕은 42세 즈음에 첫 왕자가 태어나자, 기쁨에 겨워 5세가 되던 11년(691) 3월 1일에 태자로 봉하고, 13일에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태자로 책봉한 지 1년 남짓 지난 뒤인 신문왕 12년(692) 7월 2일 48세경에 죽음을 맞이하며, 시호를 ‘신문(神文)’ 이라하고 이곳 낭산의 동쪽에 장사하였다.


삼층석탑은 죽은 신문왕을 위해 아들 효소왕과 신목왕비가 건립을 하였다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삼층석탑을 건립한 사람은 신목왕비였을 것이다. 당시 효소왕은 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신목왕비가 섭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신목왕비가 섭정을 하는 데 크게 걸림돌이 없었던 것은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7)가 섭정을 하다가 천수 원년(690) 9월에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실력을 행사하는 사회였기에 여성이라 하여 크게 장애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추석연휴가 시작된다. 즐거운 추석이지만 나름대로 부담이 느껴지는 연휴이기도 할 것이다. 많은 여성분들이 추석연휴에 음식하고 설거지하는 것에 힘들어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내게 늘 하시던 말씀 중에 ‘나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꼭 남자로 태어날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나와 아버지에게 한 말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향한 분노였다.


이제는 상차리는 남자가 ‘상남자’ 이고, 요리 못하는 남자가 찌질한 남자로 취급받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이제는 남자라는 이유로 평소에 어머니의 음식준비와 설거지를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많이 후회가 된다. 왜? 내 세대에 이렇게 되었느냐고 말하는 남성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시대는 남성이라고 해서 여성이라고 해서 장애가 되는 일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에는 함께 일하고 함께 쉬는 행복한 한가위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3&a...


김호상, 문화유산, 경주, 신라, 낭산, 황복사, 신목왕비, 신문왕
One line comment(0) 
PDF
Bookmark
E-mail
0bytes / 200bytes
View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