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목관묘 발굴현장(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10.6.18, 경주 탑동 21-3,4)
설명) 길이 196cm, 폭 84cm 크기의 신라건국기 목관묘(1~2세기)로 경주시내에서 처음으로 수장급의 묘가 조사되었다. 목관 내부에서는 옻칠을 입힌 나무칼집의 동검과 철검, 그리고 시신 얼굴을 가리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칠기 부채 등의 유물을 관찰하고 있는 젊은 고고학 연구자들의 즐겁고 진지한 모습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지은이는 고대 그리스작가 호메로스(Homeros)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다만 기원전 8세기 트로이와 그리스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비극을 다룬 그리스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호메로스가 서사시로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리아스]는 서사시적인 문학이지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지만, 이 [일리아스]의 내용 중 ‘트로이성(城)이 불타는 모습을 배경으로 한 갑옷 입은 병사가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은 채 탈출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아담 엘스하이머가 1600년경에 그린 ‘불타는 트로이’라는 그림으로 현재는 독일 뮌헨 알테피나코텔에 전시되어 있다.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일곱 살 소년이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책 속에서 이 불타는 트로이 성을 보고 언젠가는 그 성을 찾겠다는 꿈을 꾸었다. 14세에 아버지가 교회의 헌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교회에서 쫓겨나 학업을 중단한 그는 이곳저곳 상점 점원노릇을 하며 손님들로부터 [일리아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가슴속에 그 꿈을 키워가면서, 장사도 했고 조국 독일을 떠나 멀리 미국에까지 가서 사업을 하여 36세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한번도 어릴 때의 그 꿈을 잊은 적이 없어서 이때부터 슐리만은 어릴 때의 꿈을 찾기 위해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하였다.
그리스어를 배운 그는 1864년 마흔둘의 나이에 트로이 땅을 처음 방문해 히사를르크 언덕을 트로이라고 믿는 영국인 고고학자 프랭크 캘버트을 만났다. 이 때 슐리만은 히사를르크라는 지명이 터키어로 ‘요새가 있는 곳’이란 뜻이었고, 주변경관이 호메로스가 노래했던 트로이성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에 발굴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1873년 5월 31일 트로이 성의 유물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도 트로이 발굴 당시 제대로 된 발굴 방법을 알지 못해 ‘리시마코스’시대에 세워진 성벽일부를 파괴 하기도 하였고, 자신도 모르게 트로이의 일부를 없애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곱 살 때의 꿈을 잊지 않고 신화와 전설로만 알려졌던 트로이성을 찾았으며, 자기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 슐리만의 이야기는 어린시절의 꿈과 상상력을 키워나가도록 하는 대표적인 희망의 이야기이다. 일생을 걸고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값지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연구하는 한분야인 고고학은 한 세기 전 까지만 해도 몇 주일간의 발굴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문명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모델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인디아나 존스’라는 모험영화를 만들었고, 고고학이 흥미진진한 발견과 모험으로 가득 찬 학문 분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고고학의 현실은 낭만과 꿈을 이루는 영화의 장면이 아니다. 뼛속까지 추운 겨울에도,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에도, 장마철 물에 잠긴 유적의 물을 퍼내면서도 고고학을 전공한 연구원은 잃어버린 역사의 조각을 맞추며 감내하고 현장을 지켜왔다.
이들 연구원들은 발굴된 유적의 보고서가 발간되는 기간에는 며칠 동안 양말도 갈아 신지 못한 체 인쇄소에서 밤을 새워 결과물인 발굴보고서를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살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수의 연구원들이 고고학이라는 그동안의 애증의 작업을 그만두고 다른 분야로 이직하는 경우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문명’을 ‘황금의 궁전’을 찾는 꿈이 현실이 아니라서 떠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다. 더욱이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법인의 이사장과 원장님들, 또 관련학계와 기관에서는 흔들리는 젊은 연구원들에 대해 지금보다 더 큰 애정과 배려가 필요로 할 때이다. 이것은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연구하는 선두에 서왔던 고고학계의 모습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