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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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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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해 사랑하는 자식을 땅에 묻다
 | 문화유산편지
최종 수정일 : 2016/12/16

여행지역 : South Korea
 | 조회수 : 1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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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효자 손순이 살았던 곳에 세워진 1970년 유허비각 전경(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623)

설명) 고려후기 일연이 1281년에 편찬한 [삼국유사]는 5권 9편으로 된 역사책이다. 그러나 일연 당시에 출간되었는지는 불명확하며, 제자 무극이 1310년에 간행한 것이 전해오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의식이 스며있다고 평가한다. [삼국유사] 5권 마지막 9편에는 ‘효도와 선행’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일연 역시 지극한 효행으로 어머니를 모셨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효(孝)를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당시 대표적이었던 효행을 기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손순(孫順)은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손순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어 매양 그 할머니가 먹는 것을 빼앗아 먹으므로 손순이 이것을 난처하게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자식은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두 번 구할 수 없는데 잡수시는 것을 빼앗고 보니 어머님이 얼마나 배고파하시랴! 우선 이 아이를 묻어버려서 어머님이 배부르시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들은 곧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북쪽 들판으로 가서 땅을 파다가 문득 매우 이상한 돌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랍고 괴이하여 잠시 나무위에 걸고 한번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들을만하였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도 이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소’라고 하니 남편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곧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아놓고 쳤더니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은은한 품이 보통이 아니니 빨리 알아보라’고 하였다. 왕의 사신이 그 집에 와서 사연을 알아보고 자세한 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옛날에 곽거(郭巨, 중국 한나라 때 인물)가 아이를 묻으니 하늘이 금솥을 주었고 지금에 손순이 아이를 묻으매 땅에서 돌종이 솟아났구나. 전대와 후대의 효도가 한 하늘 아래 같은 본보기가 되었다’ 라며 곧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를 숭상케 하였다. 손순은 옛집을 절로 만들어 이름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돌종을 여기에 안치하였다.

현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손순의 부모에 대한 효도에 감동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식을 버리는 부모의 비정함에 냉혹함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생명의 존엄이 오늘날과 비교해 고대사회가 아무리 낮다고 하여도 자식에 대한 애정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의 사회문화가 자식보다 부모에 대한 효행을 우선시 하였던 사회임을 감안한다면 그리 낯설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효행이야기다. 부모를 잘 봉양하기 위해 자식마저 버릴 결심을 했던 손순의 효행에 관한 일화가 더 이상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40대 후반의 중년친구들에서 또 노년층에 이르는 선배들로부터 종종 농담처럼 또 푸념처럼 듣는 이야기로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세대요,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 라는 말들을 한다. 더불어 듣는 많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장남과 맏며느리들의 고충이야기이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토막을 해 보자면, 결혼 전 나의 어머니는 노동과 병마로 오랜 기간 싸우시다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시골에 홀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병간호와 아버지를 모시며, 친척들의 길흉사로 나의 맏형과 형수님은 결혼 후 주말이라고는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계시던 아버지마저 돌아 가셨을 때 슬펐다. 그 슬픔은 살아가면서 잊혀지지 않고 문득 문득 되살아난다. 아버지를 흙속에 묻고 나서 나는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초록색이 짙어오는 5월이 오면, 카네이션 꽃만 보면 나는 ‘병마와 싸우시는 부모님이라도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본다.

이 글을 읽고 계시지는 않지만 나는 왜 장남으로 태어났을까? 수없이 되물었을 나의 형과 형수님에게 늘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해봅니다.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효(孝)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지켜가는 우리의 찬란한 전통문화가 다시금 살아나는 한국사회가 되길 바라며, 문화유산편지 가족분들도 5월에는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부모형제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보세요.

우리 시대 장남이란,
고개 숙인 한국 남성의 표상이다.제사라는 굴레를 아내에게 씌우는 남편으로서, 동생들을 보듬어야 할 능력 없는 큰형으로서, 또 조만간 생계 능력을 상실할 부모를 모셔야 할 큰아들로서 이중삼중, 책무만을 지닌 존재일 뿐이다. 이미 파탄이 난 결혼 생활을 접지도 못하고,그렇다고 훌쩍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 하는 현실의 포로인 것이다.

왜 나는 장남으로 태어났을까! 살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었다. 2004.6.22. 고도원의 아침편지 재인용(윤영무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중에서)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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