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경주 용강동고분(사적 제328호)출토 여인토용(女人土俑)
내용) 경주에서 신라시대 석실고분 발굴조사의 시초는 일제강점기 1937년 충효리 석실고분과 1968년 서악리 석실고분의 발굴조사였다. 이후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실시한 용강동 석실고분 1기와 198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실시한 황성동 석실고분 1기가 대표적이었으며, 당시 이 고분들의 발굴조사의 성과는 매스컴의 집중조명으로 전국민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필자는 대학생으로 황성동 석실분 발굴조사에 참여하였고, 용강동 석실분 발굴조사 역시 틈틈이 현장을 견학하였다. 두 고분에서 출토된 가장 특징적인 유물은 토용(土俑, 무덤의 주인공을 시중들던 사람들을 묘사한 흙 인형으로 순장의 대체물로 여기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이다.두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에서 우리는 고대인들의 복식과 생활모습들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여인상은 몸체가 매우 풍만하여 오늘날의 미적기준과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여인들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이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출처) 고적발굴조사단(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박물관
인간의 역사를 볼 때 옷은 다양한 목적에서 착용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부끄러움과 치부를 가리는 과정에서 옷을 입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연유로 인류최초의 옷으로 무화과 잎이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추위, 더위와 같은 외부적인 환경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위해 만들어 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최초의 옷은 짐승의 가죽과 나무 잎사귀, 풀 등으로 만들어 신체의 민감한 부분을 보호하였을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삼국 모두 관복(官服)은 관리들의 신분에 따라 복식의 차이를 색상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신라는 신분등급에 따라 관복의 색을 자색, 비색, 청색, 황색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이것은 신라 법흥왕 7년(A.D 520)에 제정된 율령(律令)중 공복제도(公服制度)가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자주색옷[紫衣]은 신라의 의복제도에서 왕을 제외한 최고 관등부터 제5관등까지의 관리가 입었던 옷으로, 이 관등은 신라골품제에서 진골에 속하는 신분의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지위로 자주색은 진골들만의 복색이었다. 다홍색옷[緋衣]은 제6관등에서 제9관등까지의 관리에 있는 신분의 사람이 입었던 옷으로 신라골품제에서 6두품에 속한 신분의 사람이거나 또는 진골로서 그에 상응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지위로, 다홍색옷은 기본적으로 6두품의 복색이다.
푸른옷[靑衣]은 제10관등에서 제11관등에 있는 신분의 사람이 입는 옷으로 신라 골품제에서 5두품에 속한 사람이거나 또는 진골, 6두품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지위로, 푸른 옷은 기본적으로 5두품의 복색이다.누른옷[黃衣]은 제12관등에서 제17관등까지의 관리에 있는 신분의 사람이 입었던 복색으로 신라골품제에서 4두품이 입었던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신라말기에 이르면 의복이 매우 사치스러워지고 상하의 구별 없이 모든 등급의 관리들이 외래품을 숭상하고 토산품을 천시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흥덕왕은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고 신분에 따른 복식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834년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은 고도로 발달한 염색기술과 직조기술로 의류를 통해 개성을 나타내는 사회로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이 아니면 자유롭게 옷을 선택하여 입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에 있다. 사람의 옷차림이란, 그 사람의 내면을 들어내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세련되게 소화시킨 옷차림이나 본인의 고유한 스타일을 맵시 있게 나타낸 사람들을 보게 되면, 유명한 브랜드의 옷이나 옷걸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멋쟁이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수년 전 부터 청와대와 공무원 사회에서도 여름철에는 에너지 절약차원에서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있다. 이제는 여름 뿐 만 아니라 직업과 관련된 유니폼과 특별한 경우가 아닌 때에는 공무원들도 이제는 남의 이목을 떠나 자유롭고 편안한 옷차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