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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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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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 가을 오후, 황복사 터를 찾아가자!
 | 문화유산편지
최종 수정일 : 2016/12/17

여행지역 : South Korea
 | 조회수 : 12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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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황복사 절터 전경(구황리 삼층석탑, 경주시 구황동 103)

설명) 나(유홍준)에게 경주를 가르쳐준 분은 국립경주박물관장을 두 번 역임한 소불(笑佛) 정양모선생이었다. 소불선생의 ‘자네, 진평왕릉 가보았는가?’ 이 물음 이후 경주에 갈 때마다 맨 먼저 들르는 곳이 언제나 진평왕릉 이었지만 느낌이 없어 고통스러운 화두 속 7년 만에 깨달았다는 곳. 그 곳은 사계절 중에서 오뉴월 들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가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한다.(유홍준, 1993,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pp.135~140)

이 진평왕릉과 벌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황복사 절터의 아름다움은 나를 경주에 머물러 살게 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며, 필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경주유적지이다. 필자역시 다가오는 10월에는 홈페이지의 남간사지 당간지주 다음으로 꼭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황복사(皇福寺)라 전해지고 있는 절터는 신라인들이 가장 신령스럽게 여겼던 낭산(狼山, 산의 모습이 ‘이리(狼)’처럼 생겼기 때문일까?)의 동북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찰의 창건연대와 내력을 밝힐 수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다만 [삼국유사]에 ‘의상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곳 이었다’라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선덕여왕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사찰로 추정된다.

한국불교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의상대사는 진평왕 4년(A.D 625)에 출생하여 20세에 승려가 되었고, 26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돌아온 후에도 황복사에 머물렀다. 이것으로 보아 황복사는 의상대사와 인연이 깊은 절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찰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실의 명복을 기원했던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황복사 터에는 삼층석탑, 흙속에 묻힌 십이지신상, 귀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조각이 우수한 십이지신상은 삼층석탑 동편의 밭 가운데 건물의 기단부처럼 보이도록 배열되어 묻혀 있는데 12개의 신상 중 8개의 신상이 현존하지만 현재는 흙에 묻혀 볼 수가 없다. 다만 이곳의 십이신상은 새겨진 돌의 재질이나 각 십이지신상들이 자신들이 호위하는 고유한 방위가 아닌 곳에 배치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근처의 어느 왕릉에서 옮겨 온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 탑의 동편에는 머리와 몸이 심하게 파손된 귀부 2개가 동서로 나란히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탑을 세웠던 내력과 사찰을 세웠던 내력들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1943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하여 해체 복원될 당시,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와 많은 수의 유리구슬, 은과 동으로 만든 굽이달린 잔(高杯)이 출토되었다. 이 중 금동사리 외함 덮개에 새겨진 삼층석탑의 조성명문에 효소왕과 신목태후(신문왕의 왕비)가 아버지와 남편인 신문왕의 명복을 위해 탑을 세웠다 기록되어 있다. 또 후대에 추가로 706년(성덕왕 5) 성덕왕이 석탑의 2층에 사리장치를 마련했다는 것과 부처의 사리 4립(粒)을 안치하였다는 것은 발견된 유물과 일치하나, 당시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다라니경 1권이 부식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고, 6촌(寸) 크기의 순금미타상 1구는 그 크기로 보아 출토된 2점의 불상 중에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대좌와 광배를 완전히 갖춘 금동여래입상(국보 80호)은 함께 출토된 좌상보다 앞선 형식을 띠고 있어 692년 탑 건립 때 안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순금여래좌상은 앞에 것보다는 좀 더 발달된 형태를 취하고 있어 706년에 안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이 불상은 얼굴이 풍만하고 눈은 웃고 있으며, 이 불상은 불신과 대좌, 광배가 분리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사리함과 불상 등 이 탑에서 발견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가까이에서 석탑과 함께 볼 수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황복사 터는 1928년 조선총독부와 1968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에 의하여 절터의 일부가 발굴조사 된 적이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의 경관이 변화 없이 자연스럽게 유지되어온 유적지 중의 한 곳이다. 특히 벼가 익어 황금들판을 이루는 가을날 오후의 황복사 폐사지 답사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낸 그야말로 아름다운 유적지 가운데 한 곳이다. 해 돋는 이른 아침이든 해지는 일몰이든, 4계절 언제라도 좋지만 그 중에서도 모내기하는 5월과 벼가 익어가는 9월과 10월의 가을날 오후에 이곳을 찾는다면 정신없이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여유로움과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쉼터 가 될 것입니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8&a...



김호상, 문화유산, 신라, 경주, 황복사, 진평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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