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신라시대 도시유적 발굴현장(진흥문화재연구원, 2014. 5)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는 10월 24일 시작하여 11월 15일까지 실시되었다. 인구주택총조사는 5년마다 통계청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며, 올해는 현장조사 20%를 표본조사로 조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인구조사는 호적을 기초로 인구수를 집계한 것처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서도 호적 등을 통하여 인구통계를 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인구조사는 아주 철저하게 실시하였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자료가 바로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촌락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지금의 청주시 부근에 있던 4개 촌을 대상으로 하여 인구와 토지를 비롯한 각종 경제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4개 촌에 대한 기록인 이 촌락문서에는 크게 현재 상황과 3년 사이의 감소 내용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상황에는 3년 사이에 늘어난 내용도 자세히 적혀 있다. 먼저 촌의 전반에 걸친 사항으로 촌의 면적, 공연(孔烟), 계연(計烟)의 수치를 기록하였다.
공연이란 가호(家戶)의 단위로서 신라는 거주민들을 빈부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각종 부담을 지웠다. 이 공연의 등급에 의해 계연이 정해지는데 이것은 그 촌락의 경제력을 한 눈에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촌 전반에 관한 사항 다음에는 현재 촌의 인구수를 연령별로 기록하고 말과 소, 논과 밭, 유실수의 숫자를 기록하고, 끝으로 감소된 인구수와 말과 소의 수를 적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내용이 바로 인구와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현재의 촌 전체 인구수뿐만 아니라, 3년 사이의 변동 사항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인구를 연령별로 등급을 지워서 구분하기까지 했다. 성인이 된 사람을 정, 정녀라고 불렀고, 미성년자인 경우는 소자, 소녀, 추자, 추여자, 조자, 조여자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부역을 면제받을 나이가 된 사람들은 제공, 제모, 나이가 많은 노인은 노공, 노모로 구분하였다.
이와 같이 연령등급을 세분화 한 것은 부역동원 대상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고려나 조선시대의 성인 남자를 제외한 인구에 대하여 그리 자세한 조사를 하지 않았던 것과 차이를 보이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촌락문서에는 촌내의 개별 가호의 인구 사항에 관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촌락문서는 촌 단위의 인구사항을 집계한 집계문서의 성격에 가깝다. 아마도 호적을 기초로 촌 단위로 집계한 통계자료로 여겨진다.
신라의 인구수를 살펴보면, 중국측 기록에 나타나는 3세기 중엽경 진한과 변한의 인구는 2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신라의 인구수는 [삼국사기]를 보면 668년에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2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사실이 나타난다. 이 20만 명은 군역의 의무를 지닌 정남이 차지하는 비율이 [신라촌락문서]에는 21%에 해당하고 있다. 이를 감안한다면 5배를 곱한 숫자 100만이 인구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인구 100만의 중심지 경주의 인구가 17만8천여명 정도였고, 대한민국인구 5000천만 시대의 중심지 서울의 인구는 1천만여명으로 두 나라 수도의 인구집중비율이 지나치게 높다. 신라의 수도, 경주가 어떻게 변화 발전하였고 또 무엇으로 도시의 기능을 잃었는지? 더불어 신라의 지방인들은 수도 경주를 어떻게 보아왔는지? 오늘날의 수도 서울은 대한민국의 변화발전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지 한번 쯤 미래를 위해 역사를 돌아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