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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평택 #1 - 잘 알지만 또한 잘 모르는 이순신의 이야기. 아산 현충사 - (한국여행)
 | Holiday Journal
최종 수정일 : 2017/03/02

여행지역 : South Korea
 | 조회수 : 105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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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설문조사하면 언제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름을 올립니다. 그는 10세부터 20세까지 문과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과로 방향을 전환해 31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급제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됩니다. 첫 부임지는 함경도 변방에서 육군으로 그저 그런 활약을 보이던 그가 수차례의 수군과 육군을 오가는 우여곡절 끝에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영웅은 난세에 나타난다고 북방 말단 장교에서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에서 그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됩니다. 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하지만 잘 모르고 있는 그의 인생을 잠시나마 이야기하며 현충사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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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많이 내려 현충사 앞은 온통 눈밭으로 변했습니다. 덕분에 이번 여행은 눈과 씨름했지만 눈 풍경은 많이 담을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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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입구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는 충무공과 관련된 많은 국보와 보물급의 전시물을 구경할 수 있는데요.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역사책에서 몇 줄의 요약 본으로 간략하게 배운 그의 인생을 조금 자세히 들어다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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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글자로 모양을 만든 이 책은 ‘충무이공전진도첩’이란 책입니다. 열 가지 진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학익진’이 가장 왼쪽입니다. 선단을 학 날개 모양으로 반원으로 취해 적을 포위해서 공격하는 진법이죠.



그 외에도 참 많은 서책들이 전시되고 있어요. 왼쪽 상단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를 옮겨 적은 책인 임진장초, 우측 상단은 그가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서간첩, 그리고 우측 하단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의 일기를 엮은 책인 난중일기 입니다. 모두 현재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좌측 하단은 1576년 무과에 급제했을 때 임금이 내린 교지, 요샛말로 합격증입니다. 보물 제156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충무공이 무과에 급제하고 첫 임지는 함경도 변방의 말단 종9품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3년간 근무하고 종8품의 직급으로 서울로 올라 왔는데, 상관의 비리에 반기를 들다 8개월 만에 충청도로 좌천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주목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징비록을 썼던 류성룡이었습니다. 류성룡은 당시 대학자였던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중앙 요직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던 인물인데, 이 인연으로 류성룡은 충무공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국 동전 100원의 앞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의 초상화, 언제 봐도 자랑스럽습니다. 오른쪽은 방금 말씀드린 징비록(국보 제132호)인데,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류성룡이 임란이 끝나자 전쟁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후손들에게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타이르기 위해 작성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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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나와 다시 넓은 마당을 가로지르면 ‘충무문’을 만나고 저길 지나가면 현충사와 그가 살았던 고택 등을 만나게 됩니다. 눈 내린 평일 아침에 갔더니 사람의 발자국도 거의 보이질 않고, 관람객도 저 혼자 있는 것 같네요. 새 눈을 제가 다 밟아버리겠습니다!


다시 그의 이야기를 이어 가자면, 이순신은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큰 기회가 찾아 옵니다. 왕을 제외하고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당시 이조판서 직책을 맡고 있는 실세였던 율곡 이이가 그를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그에게 전한 사람은 류성룡인데, 이 말을 듣자마자 충무공은 단박에 거절해 버립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율곡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를 알아주고 밀어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법인데, 종8품의 말단 관직에 있는 자가 이조판서의 프로포즈를 거절한 겁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요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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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충무문을 들어서니 오른편으로 ‘정려’라는 전각이 보이네요.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가 마을에 났을 때 임금이 하사한 편액을 걸어 후세에 본받게 하라는 목적을 가진 건물인데요. 이곳에는 충무공과 그의 조카, 그리고 후손들까지 모두 다섯 분의 편액이 올라가 있네요. 대단한 집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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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보고 혼자 신났습니다. 영역표시하는 강아지마냥 여기저기 누워 제 흔적을 남기고 다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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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마을 중앙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반송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네요. 반송은 소나무의 변종인데, 줄기가 밑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올라오는 나무에요. 110년 정도 되었는데 그 크기에 놀라게 되네요.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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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충무공이 살던 고택이 있습니다. 이곳은 그가 21세 때 혼인하여 장인에게 물려받은 집인데 31살 때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집 뒤편으로는 그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어 매년 제사도 지낸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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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옆으로는 500살이 넘은 오래된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활 쏘기 연습을 한 곳입니다. 이 은행나무들은 그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운구가 집 앞을 지나 장지로 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봤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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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보셨던 반송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충무공의 정신과 위업을 기리는 장소인 현충사가 있어요. 1706년(숙종 32년)에 아산의 유생들이 조정에 허락을 받아 지었는데 숙종이 ‘현충사’라는 현판을 내려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씨 종가 집안이 어려워져 경매로 넘어갈 처지에 놓인 적도 있었는데, 전국에서 성금이 모여 지켜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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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면 그의 전신 초상화가 위엄 있게 걸려 있습니다. 묵념을 하고 나서 그의 면전에 카메라를 들이댈 엄두가 안나 사진은 담지 못했어요. 조선 최대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부산포로 침략하면서 7년 동안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리만큼 파괴 되었습니다. 보름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압록강변까지 도망을 갔고, 조선은 멸망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충무공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노량해전까지 20여회의 전투를 치뤘는데 모두 승리했습니다. 일본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패색이 짙었던 전황을 완전히 뒤집는 일을 해낸 그 앞에서 카메라를 불쑥 들이댄다는 게 죄스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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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지금도 장인이 물려준 집에서 아산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을까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난은 아마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체포되어 백의종군 할 때였을 겁니다. 이 시절 그는 일기(훗날 ‘난중일기’로 편찬되었어요.)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조선의 문관)의 종의 집에서 가족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여러 벼슬아치들이 찾아와 만났고, 그들이 가져온 술을 마시고 취하며 위로를 받았다. 영의정 류성룡과 다른 고위 관직들도 사람을 보내 내게 문안을 했다. (이해하기 쉽도록 제 임의대로 의역하고 내용을 축약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를 훗날 다른 사람이 보며 책으로 편찬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써 내려가진 않았을 겁니다. 글에서 그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 적어 내렸어요.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며 국가의 위기를 면했지만, 근거없이 갑작스레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던 억울한 사람이 쓴 일기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분노가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의 위대함은 항상 평정심을 찾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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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나오는 길에 뒤를 돌아보니 홍살문 앞으로 소나무가 지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어떻게 글을 써내려 갈까,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낍니다.


다시 그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전쟁이 소강상태에서 다시 발발한 건 정유년(1597년)이었습니다. 정유재란이라 그러죠. 그 해 원균은 수군을 이끌고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조선의 수군은 궤멸됩니다. 일본군은 곧바로 남원과 전주를 지나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자 조정은 충무공을 뒤늦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게 됩니다. 교지에서 왕은 이순신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다며 미안한 마음을 전하지만, 수군의 남은 배는 13척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는 명량으로 나가 고작 13척의 함선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 냅니다. 이때 전투에 참가하기 전 그가 쓴 글귀가 바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입니다.


그리고 어느 맑은 날, 천안에서 그는 아들의 전사 편지를 받습니다. 열어 보기도 전에 머리가 어지럽고,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적혀 있어 편지를 읽기도 전에 그는 목놓아 울었을 겁니다. 하늘이 어찌 이리도 어질지 못하냐며 울부짖으며 하루가 한해와 같았을 그의 마음이 저 또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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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에서 임진왜란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생에도 동시에 끝났습니다. 사후 그는 1등공신과 좌의정에 추증되었다가, 정조 17년(1793년)에 와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정조가 그에게 내린 ‘영의정증직교지(보물 제1564-16호)’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광화문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되면서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의 영웅, 오늘 그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는 건 어떨까요?


Map

+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100

+ 전화 : 041-539-4600

+ 관람시간 : 오전9시 ~ 오후5시 (하절기는 오후 6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 무료



아산, 이순신,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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