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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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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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봉상왕, 스스로 목매어 죽다!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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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온달산성 성벽(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설명) 고구려 평강왕(재위 559~590)의 딸, 평강공주의 남편인 온달장군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곳이 아차산성(서울시 광진구 워커힐로 177)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온달산성에서 전사하였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온달의 신분은 공주와 결혼한 사실과 또 그가 대형(大兄)이라는 높은 관직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신분은 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온달을 바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사회에서 지켜져 오던 왕족끼리 이외의 신진세력과 결혼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 당시 구 귀족들이 온달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한 업신여김에서 부른 명칭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온달산성과 같은 삼국시대의 성벽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고된 노동을 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출처) 사진은 blog.daum.net/bae6607 메탈님의 자료를 올렸습니다. 많은 블로그 중에 한국의 성곽과 읍성사진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고구려 봉상왕(烽上王)때의 창조리(倉助利)와 신라 문무왕 때의 의상법사가 백성들이 궁궐을 수리하고 성벽을 쌓는 고된 노동을 중지해 달라고 왕에게 충언을 하였다.

창조리는 고구려 봉상왕 때의 사람으로, 국상(國相) 상루가 죽자 대사자(大使者)였던 그가 국상이 되었다. 그는 봉상왕 9년(292) 가을 8월에 나라 안의 나이 15살 이상인 정남(丁男, 징병대상의 남자)들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일에 지쳐서 그 때문에 도망하여 떠돌아다니게 되니 창조리가 간언하였다. ‘하늘의 재앙이 거듭 닥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길을 잃어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다니고 어린이와 늙은이는 구렁텅이에 뒹구니 지금은 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공사에 시달리게 하니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물며, 이웃에는 강한 적이 있어 우리의 피폐함을 틈타 쳐들어온다면 국가와 백성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왕이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 바라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의 중함을 보여 주겠는가? 지금 국상이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의 칭송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창조리가 말을 하였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어진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임금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성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국상의 자리를 이어 받았으니 감히 말을 아니 할 수 없을 뿐이지 어찌 감히 칭찬을 구하겠습니까.’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합니까? 바라건대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시오.’ 하였다. 창조리가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을 알고 물러나 여러 신하들과 폐위할 것을 모의하니 왕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라 문무왕은 즉위하여 남산성을 중수하고 성안에 큰 창고를 설치하였고, 3년에 걸쳐 부산성을 쌓고, 안북하 강변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을 쌓기 위해 책임관리를 명령하자, 이때 의상법사가 이 말을 듣고 글을 올려 아뢰었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타고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도록 할 것이요. 만약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이에 왕이 공사를 곧 중지하였다.

역사의 기록에는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목매어 자결한 봉상왕과 모시던 왕을 죽게 하여 반역한 신하로 기록된 창조리와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여 선정을 베풀어 통치한 문무왕과 의상법사의 두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통해 동일한 두 충언의 결과가 각기 그 종말을 달리한 것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고 있다.

현재의 우리사회에서도 대부분의 분야에서 지도자에게 어렵고 힘들게 충언하지 않고, 편하게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진정으로 지도자를 모시고, 진정한 지도자라면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의 길은 외롭고 힘든 길이기도하다. 지도자이거나 지도자가 되고자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일반국민들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맡은바 소임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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