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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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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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손시양의 정려비와 부모님의 은혜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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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주 황남동 손시양 정려비 전경(보물 제68호)

설명) 이 석비는 노천에 있던 것을 1977년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필자가 어제 손시양 정려비를 촬영하던 중 5월은 어린이의 달이기도 하여 황남초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놀기에 기념으로 촬영한 것입니다. 가정의 달, 가족간에 또 이웃간에 더욱더 깊은 가족애와 이웃애가 넘치기를 기대합니다.


경주 황남동 주택 길 한 쪽에는 고려 명종12년(1182)에 건립된 손시양의 정려비(旌閭碑)가 세워져 있다. ‘정려비’란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비를 말하는데, 이 비에는 손시양의 효행을 표창하는 정문(旌門)의 설치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비의 모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는 달리, 화강암을 네모기둥 모양으로 다듬은 것으로 비의 몸체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이 없는 석표(石標) 형식을 띤 점이 특징적이다.

비의 정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5행으로 130자의 글씨가 있다. 비문의 말미에는 비를 세운 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大定: 金나라 세종의 연호)와 문장을 지었던 채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손시양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 옆에 초가집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으며, 어머니 또한 돌아가시자 아버지 때와 똑같이 하여 아들로써의 예를 다하였으므로 왕이 그 효행을 기쁘게 생각하여 마을에 정표(旌表)하게 되었다’ 라는 내용이다.

손시양의 정려비는 성리학이 수용되기 이전에 삼년상을 치루었다는 내용으로 당시의 가례(家禮) 실태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진한시대 이래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경주에 있었던 사적들을 개략적으로 수록하고 있는 [동경잡기] 효행조와 우애조에 나타난 효자사례는 모두 56건(63명)으로 효자 54명, 효녀 5명, 효부 4명이다.

그런데 이 중에는 고려 때의 효자 사례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효행사례이다. 이처럼 [동경잡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 효행기록이 비문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오고 있어 지역민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한다.

오늘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간 또는 6년간의 여묘(廬墓)생활을 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우선, 3년간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수행하는 종교인이 아니라면 그 긴 기간을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도 예전에 비해서 현대인들의 의식주를 비롯하여 삶 자체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한 그 애절한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는 그대로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오늘날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사회적인 기풍이 예전 같지 못해 가끔씩 언론과 방송에서 불미스러운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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