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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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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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을 지키는 것은 백성의 마음이다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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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주월성과 경주시가지 전경(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설명)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 또는 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월지(안압지)가 신축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도성(都城)은 좁은 의미로 왕이 사는 궁궐과 종묘, 사직 등을 둘러싼 성곽(城郭)을 가리킨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궁궐이 있는 수도서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도성의 중심에는 왕궁이 자리하고, 그 주위로는 관청, 사찰, 민가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만큼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전국의 모든 물자가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화려한 소비 도시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신라도성의 화려함은 월성(반월성)과 월지(안압지) 등의 궁궐유적을 통해 그 화려함의 극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도성안의 시가지(市街地)는 현대식 도시계획을 무색케 할 정도로 바둑판식으로 정연하게 구획되어 있다. 당시 정연하게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권력과 나라의 땅이 왕의 소유라는 인식이 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구려의 장안성과 신라의 월성(반월성) 주변에는 4각형의 도시구획 흔적인 도로의 흔적이 현대의 도로하부에 잔존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경작지의 논밭길이나 두둑으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당시의 백성들은 화려한 도성을 유지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담당하였기 때문에 매우 힘들기도 하였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 역시, 즉위하여 남산성을 중수하고 성안에 커다란 창고를 설치하였다. 3년에 걸쳐 부산성을 쌓고, 안북하천 변에 철성을 쌓았다. 또 서울(경주)에 성곽을 쌓기 위해 책임관리를 명령하자, 이때 의상법사는 통일 이후에도 이렇게 힘든 상황이 지속되는 것에 대해 왕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타고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도록 할 것이요 만약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이에 왕이 공사를 곧 중지하였다.


어느 시대의 지도자이건 과도한 의욕에 따른 정책으로 국민의 세금이 늘어나는 사업이나 힘없는 반대론자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불도저식의 정책을 강행한다면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똑 같은 불만이 가득할 것이다. 모든 지도자들은 역사에 훌륭한 지도자로 남기를 원하는 정책을 펼친다. 더불어 권위와 명예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권위와 명예는 권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의상법사의 충언처럼 국민을 위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해 본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4&a...


김호상, 문화유산, 신라, 경주, 월성, 도시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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