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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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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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그린 추사의 세한도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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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세한도(국보 제 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설명) 우리의 역사상 수많은 예술인들이 있지만 추사(秋史)만큼 그 이름이 인구에 회자되고, 전국에 걸쳐 그의 작품이 전해오는 예술가는 드물다. 세한도(歲寒圖)는 그의 대표작으로 제주에 유배 중이던 1844년 제자 우선 이상적(1803~1865)이 중국의 새로운 자료들을 보내주자 그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가로 69.2cm, 세로 23cm 크기의 이 작품은 추사 그림의 격조와 품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출전) 정병삼 외, 2002, [추사와 그의 시대 -강관식의 추사시대 예술문화-], 돌베게, pp. 211~234



[세한도의 발문]

지난해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 두 가지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 또 하장령의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주었네.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오고 여러 해에 걸쳐 얻은 것으로서,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을 것일세.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온통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데, 그대는 이 책들을 구하기 위해서 마음을 쓰고 힘을 들여 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권세와 이익이 있는 곳에 주지 않고 바다 밖의 초췌하게 말라서 몰락한 사람에게 주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듯이 하였네.


태사공 사마천이 [사기]에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고 하였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인데, 초연히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좇는 풍조 밖으로 스스로 벗어났으니, 그대가 나를 권세와 이익으로 대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논어]에 이르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고 하였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 것이라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요,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지만, 성인(聖人)은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에 이를 일컬었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있어서, 귀양 오기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귀양 온 뒤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그러나 귀양 오기전의 그대는 특별히 일컬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귀양 온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으로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일컬었던 것은 단지 늦게 시드는 곧은 지조와 굳은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울 때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일세.


아 아! 서한(西漢)의 순수하고 후덕했던 시절에도 ‘급암’과 ‘정당시’ 같이 어진 사람들조차 빈객들이 시세(時勢)에 따라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였네. 심지어 하규의 적공이 문 앞에 방(榜)을 써 붙여(한번 죽었다 한번 살아남에 사귀는 정리를 알았고, 한번 가난했다 한번 부자 됨에 사귀는 세태를 보았으며, 한번 귀해졌다 한번 천해짐에 사귀는 인정이 드러났다)던 것은 그 박절함이 극에 달했던 것이니, 실로 슬픈 일일세. 완당(阮堂) 노인이 쓰네.


[제자 이상적이 세한도를 받고 추사에게 보낸 편지]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집니다. 어찌 그다지도 과분한 칭찬을 해주셨는지 감개가 실로 절실합니다.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익을 좇지 않고 도도한 세상 풍조 속에서 스스로 초연히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변변치 못한 작은 정성으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일 뿐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종류의 책은, 비유하자면 문신(文身)을 새긴 야만인이 공자의 장보관(章甫冠)을 쓴 것과 같아서, 권세와 이익으로 불타는 세속과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으로 돌아간 것일 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 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서 표구를 하여 한번 옛 지기(知己)들에게 두루 보이고 제발과 시문을 청하려고 합니다(이상적은 1844년 10월 26일에 冬至使의 譯官으로 중국에 들어가 1845년 1월에 북경에서 표구한 뒤 청나라 文士 16명에게 세한도의 跋文과 詩文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오직 두려운 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진실로 세속을 초월해서 초연히 세상의 권세와 이익 밖으로 벗어났다고 여기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분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분명 추사(秋史)와 우선(藕船)처럼 의리와 지조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 존재하고 있지만, 이제는 지성인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에서 조차 사제간의 인격적인 관계와 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추사는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 그렇게도 황량하고 차가운 세한도의 겨울 풍경을 그렸을까? 아직도 세한도는 여전히 건재한데 그림에 담긴 뜻은 퇴색돼 버린지 오래인 것 같다.


스승을 그리며 제자가 보여준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린 한 폭의 세한도(歲寒圖)가 문전작라(門前雀羅)한 지금의 사회에서도 격조 높은 의리와 지조를 지킬 수 있는 세한도가 열 폭 백 폭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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