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5 | 715658

최치원의 사산비명과 숭복사터
 | 문화유산편지
แก้ไขล่าสุด : 2016/12/02

สถานที่ท่องเที่ยว : South Korea
 | จำนวนผู้ชม : 14162
https://blog.lookandwalk.com/th/blog/kjlove1966/4723/trackback


Canon DIGITAL IXUS 50 | f/5.6 | 2012:09:21 16:45:36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red-eye reduction mode | 5.8mm

사진) 숭복사터 전경(경주시 말방리 산23-1)


『삼국사기』에 최치원은 서울(경주) 사람으로 12세에 당나라에 입국하여 18세에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갔으나 이듬해에 그만두고 24세에 ‘황소의 난’ 토벌을 위해 4년간 군대의 업무에 종사하였다. 28세 때인 헌강왕 10년(AD.884) 신라로 돌아와 왕으로부터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지방직을 자청하였으며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신라의 기운이 기울어가는 듯하자 진성왕 8년에 시무십여조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시무책(時務策)은 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을 논하여 왕에게 건의하는 글이다. 이 시무책에는 당대의 여러 가지 문제점 및 폐단, 그것이 생기게 된 이유, 구체적인 해결방안까지 제시되어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왕이 일정한 품계이상의 관리에게 시정(市政)의 잘잘못을 논하여 올리게 하였고, 과거시험과목에도 시무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시무책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과, 고려시대에는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것, 조선시대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것이 있다. 시무책은 단순히 문제제기나 불만의 표현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통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애민애국의 한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우리가 국가와 사회에 보내는 공허한 불만의 표현은 한 번쯤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역사도시 경주에는 현재까지도 그의 흔적을 전하는 곳이 많으며, 특히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마을 동편의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숭복사지에는 그의 뛰어난 학문을 알 수 있는 사산 비명 중의 하나인 유당신라국 초월산 대숭복사비명(有唐新羅國 初月山 大崇福寺碑銘)이 있던 곳이다. 비문은 헌강왕 12년에 최치원에게 짓도록 하였는데 헌강왕과 정강왕이 잇달아 승하하여 진성왕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따라서 비문의 내용은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정강왕.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代 4王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과 원성왕릉 조성 과정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현재 숭복사터에는 석재 몇몇이 남은 금당터에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쌍탑으로, 모두 2층 기단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린 모습인데, 현재는 몸돌 일부와 상륜부가 없는 상태이다. 2층 기단에는 마치 춤을 추는 듯 율동적인 모습의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문과 문짝의 조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비를 받쳤던 귀부는 1930년에 경주(분관)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 출입구 정면의 정원에 한 개의 돌에 두 개의 거북머리를 조각한 귀부(龜趺)가 전시되어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하나인 숭복사비를 받쳤던 귀부인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방문객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귀부는 진성여왕 10년(A.D896)에 만들어 진 것으로 통일신라 전성기의 거북 머리모습에서 점차적으로 용머리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숭복사지 귀부가 어떠한 이유로 옮겨졌고, 파괴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짐작만 할 뿐이다. 문화재는 원래의 위치에 있어야 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원위치로 되돌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


최치원이 쓴 많은 글 중에 특히 신라 말 고승들의 비문(碑文)인 사산비명(四山碑銘)은 가장 유명하며,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가 그 중의 하나이다. 숭복사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이 대체로 선사들의 탑비인 것과는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이어서 왕실과 중앙귀족들의 불교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있다.


숭복사비는 현재까지 13개의 비편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지만 사본이 남아 있고 비의 내용은 소상하게 알 수가 있어 복원을 시도해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최치원이 지은『봉암사 지증대사비』․『성주사 낭혜화상비』․『쌍계사 진감선사비』3개가 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대숭복사비』의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사산비명의 가치가 더 크게 알려질 뿐만 아니라 진정한 역사복원이 될 것입니다.



원문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11&...


김호산, 문화유산, 경주, 신라, 숭복사터, 숭복사, 숭복사비, 최치원
ความคิดเห็นหนึ่งบรรทัด(0) 
PDF
บุ๊คมาร์ค
อีเมล์
0bytes / 200bytes
ดูรายชื่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