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불국사 석축 세부전경(불국사의 아름다움은 석축에서 시작된다.)
설명) 마음의 거문고를 울리는 아름다움이 이런걸까?. 울퉁 불퉁하지만 잘생기고 듬직한 자연석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 위에 맞닿는 면을 맞춰 다듬은 석재를 얹는 ‘그렝이’ 기법은 자연에 인공을 가미하는 우리나라 건축에서 흔히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렇게 쌓은 석축은 지진 때 좌우 흔들림을 잘 견디고, 석재들 사이에 틈을 두어 석재들의 미세한 뒤틀림을 막아주기도 한다. 그렝이 기법의 석축을 볼 때마다 아랫사람들의 특성을 깎아 평탄하게 하지 않고, 윗사람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 조직이 더 발전적이고 견고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요즘 세상에 무언가 잘못되면 힘없는 아랫사람만 책임을 지고 잘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 보다 더 낮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 자신부터 돌아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삼금(三禁)이라 하여 송금, 우금, 주금이 있었다. 송금(松禁)은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드는데 쓰이는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것이고, 우금(牛禁)은 농사일에 소중하게 쓰이는 소를 함부로 도살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주금(酒禁)은 정해진 기간동안 술을 빚어 팔거나 마시는 것을 금한 것으로서 대개의 경우 봄 가뭄에 내려져 가을 추수 때 해제되었다.
금주령의 주된 목적은 흉년에 곡식을 아끼려는 것과 술이 윤리와 사회기강을 무너뜨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금주령의 적용범위는 일정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에는 금주령이 내려지더라도 왕을 비롯하여 사신접대용, 제사용, 혼례용, 약용의 술은 예외로 인정하여 금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며, 겨울에 추위가 너무 심하여 금주령을 완화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일반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왕도 술을 삼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금주령을 어길 경우 그 용도와 상황에 따라 달라서 훈방에서부터 장일백대를 친 후 변방 산골이나 바닷가에 유배 보내거나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주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권세 있는 자들은 권력과 예외 조항을 이용하여 아무 탈 없이 술을 팔고 마시는데 힘없는 백성들만 걸려들어 금주령은 원성의 표적이 되곤 하였다.
양반들은 금주령을 내려도 약을 마신다는 핑계를 대며 청주를 마셔서 약주가 청주의 별칭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더구나 술을 빚어 파는 사람들 중에는 관료, 사대부들이 적지 않아서 하급관원들이 제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술을 팔다 적발되어도 자신의 노비나 하인들이 주인 몰래 한 짓으로 떠넘겨 법망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금주령기간에도 구애받지 않고 공공연히 술을 먹어도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통틀어 다섯명 밖에 안되는 사관원 언관(言官)들이었다. [필원잡기]에 따르면 이들은 공무중은 물론 금주령 기간에도 음주를 허용 받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왕의 잘못을 들춰내어 바로잡는 어려운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평소에도 이렇게 기개를 꺾지 말고 키워두어야 자신의 직위와 생명을 걸고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전 청와대수석비서관회의서 대통령이 ‘원전비리 본때 있게 한번 뿌리 뽑았으면 한다.’는 강력한 대처를 주문하였다고 한다. 지난해 3월 영원히 묻혀버릴 뻔한 고리원전 1호기 블랙아웃(station blackout, 원전대정전)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역 시의원이 우연히 술자리에서 들은 한마디가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한수원은 한국전력자회사로 기능적으로 분리운영중인 공기업이기 때문에 상명하복식 조직문화를 갖고 있어 내부에서 정전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늑장보고와 조직적 은폐에 거짓말까지 한 것은 문책의 두려움 때문이겠지만, 이제는 이러한 일들은 깨끗하게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때이다.
결국 이 사건도 금주령기간에 술을 팔다 적발되면 자신의 노비나 하인들이 주인 몰래 한 짓으로 떠넘겨 법망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던 것처럼 당시의 근무자들과 이를 책임지고 있던 발전소장의 책임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전 한수원장을 비롯한 43명이나 무더기로 구속되는 일들이 발생한건 아닌가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이나 문책은 늘 아랫사람의 몫인 것을 보면, 금주령 기간에도 기개를 꺾기지 않도록 배려한 선조들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절대 권력자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 상하신뢰의 마음들이 그렝이 석축의 기단처럼 어우러져 쌓여 천년이 지나서도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움으로 전해져 오는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