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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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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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바둑신동 스승 조훈현을 꺾었다
 | 문화유산편지
แก้ไขล่าสุด : 2016/12/28

สถานที่ท่องเที่ยว :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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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경주 분황사지 출토 통일신라시대 바둑판

설명)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경주 분황사 발굴]에서 출토된 1300년 전 통일신라시대 바둑판이다. 바둑판은 흙 벽돌(전·塼)에 만든 것으로, 벽돌을 굽기 전 한쪽 면에 가로 세로 각 15줄씩 규칙적으로 그은 뒤 구워 제작했다. 가로, 세로 15줄의 바둑판은 각각 19줄의 현대식 바둑판이나 중국 하북성에서 출토된 후한시기의 가로, 세로 17줄의 바둑판 등과는 달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형식이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모든 나라에서 바둑을 두었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신라 제34대 효성왕(737-742) 조의 기록에 당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의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두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자료) 2015.6.20, 조선일보 토일섹션 B1,B2면, 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수정인용



나의 개인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조훈현은 조치훈과 더불어 한국바둑계의 전설이다. 조훈현은 바둑 신동(神童)이었다. 1957년 전남 목포 만4세의 조훈현이 사촌 매형과 바둑을 두고 있던 아버지의 손을 막으며 ‘아버지 거기에 놓으면 안 돼요!’ 하고 제지했다. ‘어린 아이가 뭘 알겠나’ 했던 아버지는 나중에 복기를 하면서 바로 아들이 막았던 그 수가 패착에 가까운 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여 바둑돌을 쥐어주었더니 꼬마 조훈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집이 많으면 이긴다는 바둑의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그는 주변으로부터 바둑의 신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바둑계에서 승승장구하여 한국 바둑계의 ‘바둑황제’가 되었고, 전국일간지에 그에 대한 소식은 일상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1990년 2월 3일, 전국 조간신문에 일제히 ‘15세 바둑신동 스승 조훈현을 꺾었다.’ 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날 뉴스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그저께 이세돌과 알파고(바둑 프로그램)와 세기의 대결에서 뉴스의 주인공이 ‘알파고’ 이었듯이 스포트라이트는 제자 이창호에게 쏟아졌다. 전날 열린 제29기 최고위전에서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반집차이로 졌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같은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창호는 내제자(內弟子, 스승과 함께 살며 배우는 제자)로 7년째 한집에 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조훈현의 마음은 복잡했다. 제자에게 졌다는 고통과 제자를 잘 키웠다는 기쁨이 동시에 밀려왔다. 조훈현이 ‘바둑 올림픽’ 이라 불리는 잉창치배(應昌期杯)에서 중국의 녜웨이핑을 꺾고 ‘바둑세계참피언’에 등극, 김포공항에서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하며 개선 행진을 벌인 것이 겨우 5개월 전인 1989년 9월이었다. 최정상에 오른 직후 맛본 패배라 그가 느낀 낙차(落差)는 컸다.


한번 미끄러지자 추락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 후 스승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판판이 졌다. 1990년 9월 국수전에선 3대 0으로 졌고, 1991년엔 대왕전, 왕위전, 명인전 등 타이틀 3개를 이창호에게 빼앗겼다. 1991년 말이 되자 이창호는 7관왕에 올라섰고, 조훈현은 4관왕으로 내려앉았다. 1995년 2월 그는 이창호에게 마지막 남은 대왕 타이틀마저 빼앗겼다. 1974년 최고위전에서 우승한지 20년 만에 그는 아무런 타이틀도 없는 무관(無冠)의 신세로 전락했다.

조훈현은 지금까지 2,700판이 넘는 대국을 치렀고, 그중 1,900판 정도를 이겼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긴 대국보다 진 대국이 더 기억에 남는다.’ 고 한다. 바둑계에서 그의 별명은 ‘전신(戰神)’이다. ‘싸움의 신’이 잉창치배 같은 세계적인 바둑대회에서 승리한 기쁨보다 제자 이창호에게 반집 차이로 패배한 기억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는 패했을 때의 소회와 깨달음을 돌이켜 지난해 에세이집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을 출간했다.


한창 나이인 37세 때 15세 제자 이창호에게 패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는 고통과 분노 보다는 ‘살려고 그랬는지 모든 타이틀을 다 빼앗기고 나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고 한다.’

무관이 된 후 예전보다 더 열심히 대회에 나갔다. 예전처럼 타이틀 방어자로 도전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본선부터 시작해 토너먼트를 모두 거치고 올라가야했다. 예전에도 이기고 지는 걸 반복했지만 승패에 정말로 초연해진 건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수많은 판을 싸우면서 ‘나는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조훈현은 1998년 국수전에서 도전자로 이창호와 다시 맞붙었다. 결과는 조훈현의 승리였다. 그는 ‘창호에게 이기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게 중요했다.’ 고 말한다.


어제와 오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바둑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사람의 지능을 빠르게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어짐에 따라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들로 더 이상 새로운 일은 아니다. 앞으로도 이보다 더 큰 변화들이 줄지어 일어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인류애를 실천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2&a...


김호상, 문화유산, 바둑, 조훈현, 이세돌, 알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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