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오봉산 주사암 : '모죽지랑가'의 배경이 된 부산성의 지맥석, 드라마 '선덕여왕'과 '동이'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득오가 화랑 죽지랑(竹旨郞)을 그리워해 지었다는 ‘모죽지랑가’는 신라 효소왕대의 일이다. 화랑의 무리 중에 득오급간(得烏級干)이 풍류황권(風流黃卷-화랑들의 명부로 추정)에 이름을 달아놓고 날마다 출근을 하다가 열흘이 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그 연유를 물으니 모량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성(富山城)의 창고지기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서둘러 갔기 때문에 연락하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죽지랑이 말하기를 “그대 아들이 만약에 사사로운 볼일로 갔다면 구태여 찾아볼 것도 없겠지만 이제 들으니 공무로 갔다 하니 찾아보고 음식 대접이라도 해야되겠다” 하고는 곧 떡 한 그릇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하인을 데리고 가는데 화랑 137인이 역시 위의를 갖추고 따랐다. 부산성에서 득오를 위문하고 휴가를 얻어 함께 돌아 오려하였다. 그러나 부대장인 익선아간(益宣阿干)이 휴가를 승낙하지 않아 실랑이가 벌어졌다. 때마침 이 모습을 지켜보던 추화군의 관리 간진(侃珍)과 진절(珍節)이 죽지랑이 부하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찬미하는 한편 익선의 벽창호 같은 태도를 비루하게 여겨 가졌던 벼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청을 들어주라고 권하였으나 그래도 승낙하지 않더니 또다시 진절의 말안장까지를 뇌물로 주고서야 승낙 받을 수 있었다.
조정의 화주(花主-화랑의 통솔자)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주려고 하였으나 익선아간이 도망하여 숨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큰 아들을 붙들어갔다. 그때가 동짓달 매우 추운날이라 성(城)안 못 가운데서 탐욕스러움을 씻어주기 위하여 목욕을 시켰더니 곧 얼어 죽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쫒아서 다시는 관청에 발을 못 붙이게 하고 중이 되지 못하게 하며, 이미 중이 된 자라도 큰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枰定戶)로 삼아 이를 표창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동방에서도 도덕이 고명하기로 소문난 원측법사(圓測法師)가 모량리 사람이라는 이유로 중의 벼슬을 얻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郞哥)라는 향가의 배경으로 득오가 죽지랑을 그리워하여 지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입지나 정치적 상황을 통해 보더라도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특히 앞의 이야기를 보더라도 고대사회에서의 군역비리는 광범위하게 연좌제로 처벌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