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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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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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교에서 비형랑의 신의를 떠올려본다.
 | 문화유산편지
最後修改 : 2016/12/16

旅行地区 :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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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신라왕경과 귀교(경주시 황남동 507번지)

설명) [삼국유사]에 귀신들이 만들었다는 귀교(鬼橋)로 전해져오는 이곳은 1999~2000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석교’의 흔적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신원사의 위치가 현재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어, 발굴조사보고서에서는 다만 ‘경주 오릉북편 교량지’로 기록하고 있다. 47호 문화유산편지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 박재복 교수님의 ‘귀교지’ 물음에 대한 답변의 편지입니다. 교수님 관심가져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참고) 임창순, 1999, [唐詩精解], 소나무. pp.473~474


문명의 발생지가 큰 강을 끼고 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읍의 위치를 선정하는데 있어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하천이나 강의 입지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이다. 신라의 왕경(王京)이었던 경주는 동쪽을 제외한 3면으로 남천(문천), 북천(알천), 서천(형산강)이 흐르고 있다. 이 하천위에 건립된 많은 교량(橋梁)들이 문헌기록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아 대부분 고고학적 확인이 힘들다. 그러나 남천의 교량과 관련해서는 가장 많은 문헌의 기록과 교량지가 잔존하고 있어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월성(月城, 반월성) 남쪽으로 흐르는 남천에서 확인되는 옛 교량지는 일정교지와 월정교지, 월정교지 하류의 목교지, 오릉 북편의 교량지 4개소가 확인되고 있다.이중 오릉 북편의 교량지는 귀교(鬼橋)로 추정하고 있다. 이 다리는 신라시대 교량 중 신원사 북쪽 도랑에 가설되었다고 하는 축조위치와 재질이 석재임이 문헌상에 명시된 유일한 다리이다.

귀교의 건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비형랑(鼻荊郞)은 진지왕(眞智王)과 도화녀(桃花女)사이에 태어났지만 이미 진지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폐위된 이후라서 다음 왕위를 이은 진평왕이 그를 궁궐로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어 집사벼슬에 임명하였더니 그는 밤마다 월성을 뛰어넘어 서쪽 황천 강가에 가서 귀신들을 데리고 놀았다.

왕이 날랜 군사 50명을 시켜 지켰으나 매번 월성을 뛰어넘어 갔으므로 군사들이 숲속에 엎드려 엿보았더니 귀신들은 모여 놀다가 여러 절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리면 저마다 흩어지고 그때서야 비형도 돌아왔다. 군사들이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이 비형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하니 참말인가?’하니 비형이 ‘네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러면 비형에게 ‘네가 귀신들을 부려서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으라’고 하였다. 비형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귀신 무리들을 부려 돌을 다듬어 하룻밤에 큰 다리를 다 놓았기에 이로 인하여 이 다리를 귀신다리[鬼橋]라고 하였다.

왕이 비형에게 묻기를 ‘귀신들 중에 인간으로 현신하여 나라의 일을 도울만한 자가 있는가?’ 라고 하니 비형은 길달(吉澾)이라는 인물을 추천하였고, 왕은 그에게 벼슬을 주어 일을 보게 하였더니 과연 충직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에 각간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던바 왕이 그를 아들로 삼게 하였다. 임종이 길달을 시켜 흥륜사 남쪽에 다락문[樓門]을 세우게 하였더니 그는 매일 밤 그 문 위에 올라가 자므로 문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불렀다.

하루는 길달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가니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겁을 내어 달아났으므로 이후 비형은 귀신을 쫒는 나라의 풍속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 만큼 사람을 추천하는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하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며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목숨을 거둘 만큼 신의를 필요로 한 것이었기에 두고두고 나라의 풍속이 되기까지 하였다고 생각된다. 요즘의 우리사회는 정권이 바뀌는 5년마다 신의와 의리를 너무 하찮게 여기는 이야기들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지겹도록 듣는다. 이즈음해서 우리들은 관중과 포숙아의 신의를 다시 한 번 되새겨봄직하다.

관중은 옛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했을 때 포숙아와 같이 장사를 하면서 나는 늘 더 이익을 취했지만, 포숙아는 내가 가난한 것을 이해하여 탐욕스럽다 하지 않았고, 내가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도 시기에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음을 이해해서 나를 어리석다 하지 않았으며, 세 번 임금을 섬겼다가 세 번 그만두었으나 사람에게는 우(遇 때를 만남)와 불우(不遇 때를 만나지 못함)가 있음을 알아서 나를 못났다고 하지 않았고, 세 번 전쟁에 나갔다가 세 번 도망쳤으나 내게 노모가 계심을 이해하여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으며, 공자규가 패하자 소홀은 죽었는데 나는 살아 옥에 갇힌 일에 대해서도 내가 소절(小節)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나타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서 나를 염치없는 사람이라 하지 않았다. 나를 나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史記], 管晏列傳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를 당나라 시인 두보의 ‘가난한 때의 사귐’이란 시를 옮겨보면 신의를 지키는 것이 고대사회에서나 현대사회에서나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손바닥을 위로 하면 구름 되고 엎으면 비가 되니,

하고 많은 경박한 사람 어찌 다 세겠는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아의 가난할 때의 사귐을?

이 도리를 지금 사람들은 흙덩이처럼 버린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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