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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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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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돌아갑시다. 온달장군!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14

Travel regions :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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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차산성(서울시 광진구 워커힐로 177) 해발 285m의 산정에서 한강을 향하여 동남으로 축성된 이 성의 명칭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아단’을 ‘아차’로 고쳐 아차성이라 불렸으며 이후 아차산성, 장한성, 광장성이라고도 불렸다.

감상) 아차산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영토싸움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장수 걸루가 백제 개로왕을 죽인 곳이다. 뿐만 아니라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온달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학계에서는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에서 전사하였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16세인 평강공주가 아버지 평강왕과 대화하는 모습에서 사춘기 소녀의 거침없는 논리 정연함과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장면이 오늘날의 이야기 같다.

출처) 연휴기간이라 아차산성 발굴사진을 대학기관으로부터 미처받지 못하여 blog.daum.net/bae6607의 자료를 올렸습니다. 많은 블로그 중에 한국의 성곽과 읍성사진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메탈님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삼국사기]에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고구려 25대 평원왕)때의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헤어진 신을 신고 저자거리를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 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놀리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하겠다.’하였다. 왕이 매번 그렇게 말하였는데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 고씨(上部 高氏, 고구려 5부중 상부 고씨. 명문집안)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하신 분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헛된 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가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이에 평강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눈먼 늙은 할멈이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온달의 어머니는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이 거쳐할 곳이 못됩니다.’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온달 또한 거절하였지만 평강공주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혼을 하였다. 이에 평강공주는 궁을 나올 때 가져온 수십 개의 보물 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물건 등을 구입하고 말도 한 필을 사서 길렀다.


고구려에서는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과 들판에서 수렵대회가 열렸는데, 온달이 이 대회에 나가 많은 짐승을 잡아 국왕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온달은 후주(後周)의 무제가 요동을 침입하였을 때, 참전하여 제1의 공로를 세웠는데 이때 왕으로부터 사위로서의 인정을 받아 대형(大兄)이 되었다. 이후 평강공주의 큰 오라버니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라며 간청하였다.


온달은 왕의 허락을 얻어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 문경새재)과 죽령(竹嶺, 단양과 영주사이의 고개)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흐르는 화살[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않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 아! 돌아갑시다.’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를 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온달의 신분은 공주와 결혼한 사실과 또 그가 대형(大兄)이라는 높은 관직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신분은 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통세력이 아닌 온달과 같은 신진세력이 중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온달을 바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사회에서 지켜져 오던 왕족끼리 이외의 결혼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 당시 귀족들이 온달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한 업신여김에서 부른 명칭이라고 생각된다.


나라의 독립과 국토방위를 위해서 희생한 순국선열 가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 슬픔의 깊이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기는 힘들다. 남은 가족들에게 이 슬픔의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문득 문득 그날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가슴속을 저미는 듯한 고통으로 되살아 날것이다. 그것은 자식의 죽음, 남편의 죽음, 아빠의 죽음, 형제의 죽음이어서 더욱 더 클 것이다.


온달의 죽음을 맞이한 평강공주의 슬픔은 짐작되지만, 또 죽음을 맞이한 이후의 꿋꿋한 공주의 마음이 느껴진다. 온달의 죽음이 후세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귀감이 되었듯이 조국을 위해 희생한 가족들 역시 굳건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들 또한 그 죽음을 오래토록 기억하고, 기록하여 남겨두어야할 의무가 있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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