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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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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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장에서 본 지식인 최치원의 양면성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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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상서장 전경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46호, 오세윤 작가 촬영)

설명)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왕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현재 상서장에는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비가 있다.



상서장(上書莊)은 최치원이 살던 집의 이름으로, ‘태조 왕건에게 글을 올린 집’ 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어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 할 때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십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 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 스승을 좇아 학문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18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나아갔다. 28세가 되자 신라로 돌아와 서학(西學)하여 얻은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자 외지인 태산군(太山郡, 전북 정읍시 칠보면)태수로 나아갔다.


당(唐)에서는 실력에 따라 관직에 나아 갈 수 있는 과거제가 시행되었으나 신라에서는 골품에 따라 신분과 계급이 정해져 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려는 왕건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치원은 신라 말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자 할 때 왕건이 비상한 사람으로 천명을 받아 반드시 나라를 열 것을 알고 편지를 보내 문안드렸는데, 그 글 중에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鵠嶺)은 푸른 소나무’ 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그의 제자들 중에는 개국 초기에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또한 고려 현종은 최치원이 조상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하여 명을 내려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14년 태평(太平)2년 임술년(1022) 5월에는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최치원은 최후에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면서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조용히 살다가 늙어 죽었다. 도우(道友)란 도(道)를 같이 닦는 벗이란 뜻으로 도반(道伴)이라고도 하며, 여기서는 불교수행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만년에 최치원이 불교에 귀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서장(上書莊)에 올라 신라최고 문장가의 한사람이었던 최치원을 생각해보면, 당시 최치원은 국비유학생으로써의 좋은 기회와 당나라에서의 경험으로 쓰러져가는 신라를 위하여 애국심으로 시무책(時務策)등을 건의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써 혼란스러운 정국에 지조를 지키지 않고, 시류에 따라 태조 왕건을 추앙했다는 것은 지식인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지지도 한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사회구성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평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세상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 또한 필요하지만, 또 어떻게 자신의 소신과 민주주의의 기본을 지켜가야 할 것인지를 역사를 통해 되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김호상, 문화유산, 상서장,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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