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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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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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릉을 통해 본 조상의 묘지, 자연으로
 | 문화유산편지
Last Modified :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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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삼릉(경주시 배동 산 73-1)

설명) 위에서부터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으로 전해진다



신라 53대 신덕왕(神德王)은 효공왕이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이 죽자,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즉위하였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궁예와 견훤의 세력이 막강하였던 후삼국의 혼란기였다.『삼국사기』에는 재위 6년(917)가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삼국유사』에는 “화장하여 잠현(箴峴)의 남쪽에 묻었다.”라고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신덕왕의 능은 경주남산의 서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삼릉(三陵)중 가운데에 있는 능으로 알려져 있다. 이 능은 1936년과 1963년 2회에 걸쳐 도굴되었으며, 1963년 도굴당시에는 국립경주박물관 박일훈에 의하여 내부조사가 실시되어 그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왕릉의 내부는 할석(割石)으로 쌓은 석실분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남벽중앙에 출입구가 설치되었다. 석실 내에는 출입구와 직각되게 넓고 높은 관대(棺臺)를 만들고 그 위에 긴 판석 2매를 놓아 시상(屍床)을 마련하였고, 동서 벽면에 장방형구획을 만들고 상하로 나누어 백(白), 황(黃), 주(朱), 청(靑) 등을 채색함으로서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고한다. 이러한 신덕왕릉의 구조는 이 왕릉이 통일기 전후의 고분임을 시사하고 있어 10세기의 신덕왕릉이 아니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신라왕릉의 진위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시대 선비인 화계 유의건이 남긴『화계집(花溪集)』에「신라왕릉의 진위여부」라는 글이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영조 6년(1730)에 경주부윤으로 있던 김시형(金始炯)이 박씨문중과 타협하여 전승(傳承)을 잃어버린 왕릉을 찾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두 문중은 남산을 기준으로 하여 남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능들은 김씨왕의 능으로 하고 남산 서쪽 기슭 일대에 있는 능들은 박씨왕의 능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본 유의건은 “자신의 조상 묘가 아닌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불행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불행한 것은 자신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제사 밥을 얻어 먹는 무덤의 주인공이다.”라고 하였다. 이 삼릉 역시 잘 못 지정된 것이며, 삼릉의 표석에도 1871년「숭정기원후오신미정월일입(崇禎紀元後五辛未正月日立)」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조상 묘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체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지만 그 중의 하나가 조상의 묘를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조상의 묘를 지키고 가꾸는 것이 효(孝)라는 생각이 뼈 속 깊이 박혀 있는 우리들에게 선조들의 묘지관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주 오래된 일반의 분묘들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새롭게 단장하는 것 보다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무덤 속 조상들이 더 원하고 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원본글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11&...


경주, 신라, 신덕왕, 왕릉, 묘지, 무덤, 제사, 김호상,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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