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남득온 효자비(경주고등학교 정문 분황사 도로길)
설명) 조선시대 경주지역에서 부모나 시부모를 잘 섬긴 사람 가운데 나라에 알려져 표창을 받은 정려비는 40여 곳에 이른다. 이들 중 조선 태종 때 세워진 남득온의 효자비는 경주에 세워진 효자비로는 최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도로변 어지러운 건축벽면에 안내문 하나 없이 세워져 있다. 오늘은 청소도구 건조대로 사용되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해야되나싶기도하고, 효를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신라 진성여왕 때의 일이다. 어느날 분황사 동쪽 마을에 나이 스물 안팎 쯤 된 여자가 눈먼 어머니를 껴안고 마주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길을 지나가던 화랑의 낭도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그들이 사연을 말하여 주었다.
이 여자의 집이 가난하여 몇 해를 두고 비럭질을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문전걸식도 어려워 남의 집에 품값으로 몸을 잡히고 곡식 30섬을 얻어 이것을 부잣집에 맡겨두고 일을 하면서 해가 저물면 쌀을 전대에 넣어 집으로 와서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고는 함께 자고 새벽이면 부잣집에 가서 일하기를 며칠이 되었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어머니가 ‘이전에는 겨죽을 먹어도 마음이 편하더니 요즘은 쌀밥을 먹는 데도 가슴을 찌르는 듯이 마음이 불편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하니 딸이 할 수 없이 사실을 말하였고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통곡하고 딸은 자신이 단지 부모의 구복(口腹, 먹고 살기위해 채우는 입과 배)을 봉양할 줄만 알았지 부모의 깊은 마음은 살필 줄 몰랐다하여 함께 통곡하는 것이라 하였다.
효종화랑(孝宗花郞)은 낭도로부터 이 말을 듣고 눈물을 지으며 곡식 100석을 보내고 花郞의 양친도 바지저고리 한 벌을 보내주었으며 낭의 수많은 무리들도 벼 1,000석을 거두어 보냈다. 이 일이 국왕께 알려지자 당시의 진성여왕이 곡식 500석과 아울러 집 한 채를 주고 군사들을 보내어 그 집을 호위하여 도적을 막게 하였다. 동리에는 정문(旌門)을 세워 효양(孝養)마을 이라고 하였으며, 뒤에는 그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고 이름을 양존사(兩尊寺)라고 하였다.
부모님을 봉양하는데 있어 의식주를 편하게 해드리는 것도 효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임은 분명하겠지만, 자식 된 도리로서의 효가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속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된 효야말로 진정한 효가 아니겠는가, 또한 길을 가다 접한 애달픈 사연에도 왕에 이르기 까지 몸소 한 마음으로 아파하고 정을 나누었던 그 따뜻함이 지금의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한 이야기가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