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상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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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문화재연구원장 김호상교수님의 글들을 소개하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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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왕과 서출지, 그리고 정월 대보름
 | 문화유산편지
최종 수정일 : 2016/12/14

여행지역 : South Korea
 | 조회수 : 12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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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서출지의 이요당(경주시 남산동 973)

감상) 글이 나온 연못이라고 하여 서출지(書出池)라고 한다. 지금까지 신라의 문화유산에 대한 영문판의 안내서 중 최고가 에드워드 B. 아담스의 황금의 시대[Golden age]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미슐랭의 그린가이드 한국편도 발간되었지만, 그의 코리아가이드북 중 10여년전 개정판의 책표지가 살얼음이 낀 겨울철의 황량한 서출지 이요당의 모습이었다. 서점에서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온 몸이 감전된 것처럼 전율을 느꼈다. 아! 어떻게 이 사람은 석굴암과 불국사가 아닌 이 사진을 개정판의 표지로 했을까? 최순우 선생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서, 홍사준 선생이 용현리 마애삼존상에서, 야나기무네요시 선생이 석굴암에서 느낀 전율과 감동이 이런 것이었을까? 강호에는 참 고수가 많다!



[삼국유사] 기록에 신라 21대 소지왕(炤智王) 즉위 10년(488)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거동 하였더니 이때에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이 까마귀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말 탄 군사를 시켜 그 뒤를 밟아 좇아가 보게 하였다. 군사가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버렸다. 길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 마침 웬 노인이 연못 가운데서 나와 편지를 올렸다.


편지 겉봉에 쓰여 있기를, ‘열어보면 둘이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고 하였다. 심부름 갔던 군사가 돌아와 편지를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에 두 사람이 죽을 바에는 편지를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점치는 관리가 아뢰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이라는 것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라는 것은 임금님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그럴성싶어 열어보니 편지 속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집을 활로 쏘아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대궐로 돌아가 거문고집을 보고 활을 쏘니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불공드리는 중과 궁주가 몰래 만나서 사통을 하고 있어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첫 돼지날(上亥), 첫 쥐날(上子), 첫 말날(上午)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함부로 출입을 하지 않으며 정월 보름날을 까마귀의 제삿날이라고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 지냈으며 지금까지 이 행사가 있다.


소지왕의 목숨을 해치려는 사람이 궁궐 내에서 불공을 드리는 스님이었다는 이 기록은 법흥왕의 불교공인 이전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는 불교가 신라에 공인되기 훨씬 이전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전파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기록에 대한 역사학계의 견해는 토착종교와 신흥종교간의 마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도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마찰은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차돈의 순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들 때문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종교문화는 매우 다양하게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타 종교에 대한 수용도 매우 개방적인 편이라 전세계 거의 모든 종교들이 들어와 있는가하면, 400개가 넘는 신흥종교들이 존재하고 거기다 예로부터 내려온 무속신앙이 수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의 종교문화는 한 종교의 절대 신념체계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종교들이 서로 공존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흔히 불교시대라고 불리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유교와 도교, 무속은 불교와 함께 그 시대문화를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불교와 무속은 심한 억압 속에서도 종교적 기능과 민간신앙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종교가 한국에 들어와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우리민족에게는 개방적인 종교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조화로울 수 있는 공존의 종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소지왕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겼을 뿐만 아니라 겸손과 공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감복(感服)하였다고 한다. 한편, 소지왕은 재위 22년(500) 가을 9월에 날이군(捺已郡: 현재의 경북 영주)에 거동하였는데 그 고을의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미모의 딸, 벽화(碧花)에게 수놓은 비단옷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는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 그에게 바쳤다. 소지왕은 파로가 음식을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열어보니 어린 소녀여서 괴이하게 여기고는 받지 않았다.


그가 왕궁에 돌아와서는 그리운 생각을 가누지 못해 두세 차례 몰래 그 집에 가서 벽화를 침석에 들게 하였다. 어느 날 소지왕은 고타군을 지나다가 늙은 할멈의 집에 묵게 되어 그녀에게 ‘지금 사람들은 나라의 왕을 어떤 임금으로 여기는가?’ 라고 물으니, 늙은 할멈이 대답하기를 ‘많은 사람들은 성인(聖人)으로 여기지만 저만은 그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듣건대, 임금께서는 날이군의 여자와 상관하러 여러 번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고기잡이에게 잡히고 맙니다. 지금 왕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을 성인이라 하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럽게 여겨 곧 몰래 벽화를 아내로 맞아들여 별실에 두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늙은 할멈이 왕에게 충고한 것은 귀한사람으로 가볍게 돌아다니면 천한 사람에게 곤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시골 늙은 할멈의 충고를 만승지위(萬乘之位: 전쟁에 전차 1만대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지위)에 있는 소지왕이 기꺼이 받아들인 점을 생각해 볼 때, 소지왕은 우리에게 어떠한 충고라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2월 15일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정월에 드는 설과 보름은 우리의 명절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설이 개인적이고 폐쇠적이며 소극적인 피붙이 명절의 성격인 반면에 정월 보름은 집단적, 개방적, 적극적인 마을 공동체 마을 명절입니다. 주변분들과 함께 근심과 액운을 물리치시고 풍요로운 한해가 되시길 기원드림니다.



원문 링크 http://www.kimhosang.com/html/sub2-2.html?page=10&...


김호상, 문화유산, 신라, 경주, 서출지, 이요당, 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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