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경주 황남동 123-2번지유적 지진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설명) 건축물의 안점을 기원하기 위하여 매납하는 지진구 내에서 확인되는 내용물은 매우 드물지만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특이하게도 금빛을 내는 도료로 알려진 황칠액(黃漆液)이 담겨진 진단구가 확인되어 진단구 내용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자연의 현상은 인간에게는 그야 말로 오묘한 대상이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계절이 바뀌는 모든 것이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고, 해일과 지진, 황사와 천둥벼락 같은 자연의 현상과 재해들이 일어 날 때에는 자연은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두려운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대에 우리선조들은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고자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거나 무속(巫俗) 등 각기 나름의 안전에 대한 기원을 거행하였다.
자연현상에 관한 역사기록을 보면 크게 바다와 땅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현상들을 매우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땅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책으로는 삼국시대부터 토착신앙과 도교의 지신(地神)이라는 개념위에 불교적인 의례가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건축물을 세울 때에는 안전을 위해 제사와 주술적인 방법을 행하였다.
그 하나의 예로 신축되는 건물의 주변이나 내부에 건물이 붕괴하거나 화재 등과 같은 여러 재앙으로부터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기원의 뜻으로 상징물을 담은 용기(容器)를 직접 땅에 묻는데, 이러한 물품을 지진구(地鎭具) 또는 진단구(鎭壇具)라 한다.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지진구의 대부분은 뚜껑이 있는 항아리 또는 그릇형태의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자기류나 금속류도 다수 출토되고 있다. 이들 지진구의 용기 내에는 무엇인가 지신(地神)에게 받치는 상징성을 띤 내용물을 담아 땅에 묻었을 것이지만, 지진구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간혹 지진구 내용물로 유리구슬, 동물뼈, 손칼 등이 확인되기도 한다.
경주지역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지진구로는 황룡사지, 구황동 원지, 전 인용사지, 신라왕경 유적 등 주요 절터나 건물지 등에서 흔하게 발견되고 있다. 이중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 한 황남동유적에서는 5개의 큰항아리를 지진구로 갖춘 유구가 노출되었고, 그 속에서는 금빛을 내는 도료로 알려진 황칠액(黃漆液)이 담긴 도장무늬가 찍힌 뚜껑 있는 그릇이 함께 출토되기도 하였다.
황칠액을 채취하는 황칠나무는 우리나라 남해안 일부와 서해안 일부지역에서만 자생하는 한국고유의 특산종으로, 옻나무처럼 도료로 이용되는데 수액의 색깔이 노란색이어서 ‘금칠’ 또는 ‘황칠’이라고 하여 황실이나 궁궐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한 물품이었다.
우리나라의 황칠에 대한 중국 측의 기록에 ‘백제의 서남쪽 바다 세 군데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수액을 6월에 채취하여 그릇과 기물(器物)에 칠하면 황금처럼 빛이 난다.’고 하여 백제로부터 공납으로 황칠 5되 3홉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해상의 왕이라 불리었던 장보고의 교역상품 중 최상품이 황칠액 이었다고도 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는 조선임금에게 황칠사용을 금지한 뒤, 황칠 생산지인 전남 해안에 대한 감시와 수탈을 강화하였다. 또한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에는 ‘수탈을 못 견딘 백성들이 나무에 구멍을 뚫어 나무를 고사시키거나 도끼로 찍어버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귀중한 물품을 건물지의 안전을 위하여 묻는 용기에 담아 지신(地神)에게 받친다는 것은 당시 신라인들에게 진단구는 건축물과 사람의 안전을 자연재해로부터 지키려는 염원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유물이다. 경주와 포항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하여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은 분들의 빠른 회복을 기원해 본다.